당신은 열매를 맺으십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시험과 고난, 당신의 삶의 풍파를 주시는 이유는 당신이 무능과 약함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다시 인도하게 하시려는 까닭입니다.

Transcript

다 같이 성경을 폅시다. 요한복음 15장입니다. (폴 워셔 목사) 우리가 본문을 읽기전에, 지금까지 말씀드렸던 아주 중요한 한가지를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그것은, 오늘 아침에 다들 그 무서운 심판에 대한 성경구절을 읽어보셨지요. 그 심판은 지상에 계속해서 내려오고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 될겁니다. 오늘 아침에 여러분들의 마음이 떨릴 때 까지 읽었었죠. 그것이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신다는 걸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분들 중에는 그 성경 구절들이 별로 와닿지 않으신 듯 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단순히 당신이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어떤 무감각함이 당신의 마음에 자라났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냥 무서운 것들을 듣기만 한 것입니다. 오늘 당신은 제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을 들으실 텐데, 이것은 삶과 죽음에 관한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중요하긴 하지만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실 수도 있습니다. 제가 여기에 초대 된 이유는 어떻게 하면 더욱 경건하고 더욱 그리스도와 같이 될 수 있는지 가르쳐 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더욱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있는 분들중 일부는,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지 않으시겠지만, 그 삶이 그걸 증명할 겁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 거의 신경쓰지 않으시겠죠.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닌 것 처럼요. 그런데 이 말이 당신을 화나게 한다면, 제가 한가지 묻겠습니다. 하루에 얼마나 많이 당신은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십니까? 하루에 얼마나 많이 당신은 일시적인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십니까? 당신의 육체적인 힘 또는 아름다움, 당신의 옷차림, 당신의 인간 관계, 이세상의 기쁨과 쾌락. 하루에 얼마나 오랜 시간 이런 것들을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하루에 얼마나 많이 경건함을 키우기 위한 생각을 하십니까? 다 절개 있게, 더 순결하게, 더 그리스도와 같게 되기 위해서요. 당신은 구원의 확신을 더 크게 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수고하십니까? 보세요. 제가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당신은 머리를 숙이고 제가 하는 말을 듣고 계시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라는 것만은 아시기 바랍니다 같은 태양이 버터는 녹이고, 진흙은 단단하게 만들죠. 관능적인 것을 조심하세요. 세상의 속한 것들을 조심하세요. 그리고 당신의 마음을 조심하세요. 당신 자신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에게 정말로, (어서요) 정말로 당신이 구원 받은 어떤 증거가 있는지 물어보세요. 당신은 오늘이 일요일이기 때문에 여기에 오셨습니까? 당신은 오늘 가족들이 다 여기 오기 때문에 오셨나요? 당신은 오늘 강제로, 강요를 받아서 오셨나요? 누구든지 진정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집에 오는 것 자체가 기쁨입니다. 그리고 어떨때는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도 지루한 설교를 견뎌야 한다고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거듭난 마음이 교회를 떠날 때, 그 거듭난 마음이 원하는 대로 다음 한 주일 동안 삶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만약에 제가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당신을 따라다니면서 당신을 촬영 한다면, 얼마나 많은 순간 당신이 정신 팔린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일시적인 것들에 대해서나, 아니면 영원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정신이 팔려있는 모습을요. 허영심, 거울, 화장, 그리고 피트니스 자동차, 좋은 집, 그리고 좋은 브랜드의 옷. 만약에 제가 당신을 따라다니면서 당신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다면, 얼마나 많이 당신이 자신을 생각하고, 얼마나 많이 당신의 마음 속에서 다른 사람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생각하면서 모든 힘을 동원해서 그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하고 계실 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훨씬 더요. 보셨죠? 오늘 여기에 계신 분들 중 일부는 거듭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들은 지옥으로 가시겠죠. 분명히요. 그리고 당신은 그 위대한 날에 깜짝 놀라실 겁니다. 예수님이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주님께서 하는 말씀은 정확하게는 이렇습니다. "나에게서 떠나거라, 네가 주장하기를 너는 나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너는 내가 너에게 아무런 법률도 주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구나. 내가 매주 일요일에 그 중요한 일들을 가르쳤지만 너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지. 너는 음란하고, 세속적이고, 육욕적이 었구나. 너는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정말로 무서운 말입니다. 저도 알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차분하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입니다 제가 경건 생활에 대해서 가르칠 겁니다만, 오늘 오신 여러분 중에 일부는 이러한 것들을 전혀 신경쓰지 않으실 겁니다. 당신은 경건한 생활에 관심이 없어요. 그리고 저와 논쟁을 하신다면, 묻겠습니다 "그렇다면 증거를 보여주시죠.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거울 앞에서 시간을 보내시는지, 아니면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시는지 보여주세요.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인간 관계에 힘을 쏟으시는지, 아니면 얼마나 오래 주앞에 아름답게 되어 그분께 가까이 하는지요.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아주 많이요. 어떤 분들은 그저 주님의 날이 올 때까지 시간을 때우고 있으십니다. 그래서 그냥 당신에게 재밌는 것만 하고 계시죠. 조심하세요. 이것들은 크고 중대한 문제들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취할 태도 중 최악의 태도는, 겉보기에는 굉장히 종교적인 모습을 하시고, 어느정도의 윤리와 명성을 그 종교에서 취하시지만 당신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없는 태도입니다. 두려움에 떠시기를 바랍니다. 자 여러분, 요한복음 15장 1절을 보겠습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우리는 이미 이 본문에 대해서 이야기 했지만, 조금 더 살펴 봅시다. 왜냐하면 이 말씀에 제가 부담을 느끼거든요. 여기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보이시나요? 주님은 "누구든지 입술로 나를 시인하지 않거나, 공적으로 서서 나를 대적한다면, 내가 그들을 제하여 버릴 것이다." 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아니에요. 주님은 지금 그분을 주로 시인하는 자들을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자신이 가지인 척 하면서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사람들이요. 그분은 말하십니다. "너희가 내게 속한 증거는 너희가 열매를 맺는 것이다." 질문 하나만 하겠습니다: 당신은 열매를 맺고 계십니까? 열매를 맺고 계시나요? 제가 이 부분을 왜 이렇게 강조하겠습니까? 왜냐하면 어느날에, 당신이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는 열매를 맺지 못했구나." 라는 선고를 듣겠죠. 열매를 맺으시나요? 지금 질문에 답하셔야 합니다. 당신이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뭐겠습니까? 그분, 하나님이신 그분이 당신을 쫓아내실 겁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쫓아내신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당신은 말이죠, 아마도 당신의 아버지가 그리스도인이고, 어머니도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분들이 아마도 교회에서 특별한 분들일 수 있겠죠. 그런데, 당신은요, 당신의 마음은 어둡고, 세상을 사랑합니다. 당신은 아마도 자신이 가지라고 고백하시겠죠. 당신은 어느정도 윤리적인 사람일 수도 있을겁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날에, 당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쫓겨난다고'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요즘에 개신교에 퍼져있는 말이 있죠: 하나님은 누구도 지옥에 보내지 않는다 여러분, 꼭 아셔야 할 것은,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경고하셨죠. "로마 군대를 두려워 하지 말라." 그분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 당시 가장 두려워 해야할 딱 한가지가 바로 로마 군대였습니다. 그들이 잘 훈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굉장히 잔인했기 때문이죠. 그들은 폭력적이고, 사람을 죽이는 걸 즐겼습니다. 만약 당신이 시저 황제가 통치하던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던 유태인이라면, 당신이 가장 두려워 했어야 할 한가지는, 바로 로마 군인들입니다. 그들의 군대요. 악하고, 잔인하고, 죽이고, 찢고, 겁간하고, 훼방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하셨죠. "육신만을 죽일 수 있는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리곤 또 말하셨습니다. "너희들이 누구를 정말 두려워 해야 하겠느냐?" 예수님이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아십니까? 그분의 아버지 입니다. 하나님은 육신을 죽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후에 당신을 지옥으로 던지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해하시나요? 당신이 세상을 떠날 때는, 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거두어 가시는 겁니다. 그리고 당신이 지옥에 떨어지게 만드는 분도 하나님이시구요. 사람들은 제게 오늘날 이시대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볼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말에 동의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죽음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걸 아시나요? 아닙니다. 사람들이 말하더군요, "출생과 죽음은 자연스러운 거죠." 죄송하지만, 아닙니다. 출생은 자연스러운 것이나, 죽음은 아닙니다. 죽음은 초자연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지금 이 땅에 나타난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매일 나타나고 있습니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해 지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만일 주의하지 않으신다면, 그 사람들과 같이 될 것입니다. 제 말씀이 무겁다는 것은 저도 압니다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사실이에요. 교회는, 아니 교회라고 불리우는 곳에는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계신 젊은이들, 당신들이 제겐 자식같은데, 전 너무 두렵습니다. 그거 아세요,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를 쫓는 부모님이 계신 집안에서 자라나는것은 정말 위험한 일입니다. 비록 부모님이 완벽하지 않으시더라도 말이죠. 진리로 세워진 교회에 가는 일 또한 위험한 일입니다. 비록 그 교회에서 대단한 일들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해도요. 그리고 주님을 알도록 교육하는 가정에서 홈스쿨링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로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당신에게 주어졌지만, 당신이 이것들을 저버린다면, 그것은 정말로 끔찍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느끼실 것 같은데, 저는 이것을 바랍니다. 여러분 중 많은 분들이 오늘 두려워 하시길 소망합니다. 당신이 당신의 현재 상태에 대해 두려워하고 떠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당신이 일어나시길 바래요. 잠에 빠지신 분들, 깨어나십시오. 제발요. 당신은 정말로 위험에 처해 있다구요. 그리고 예수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5장 3절입니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여러분은 지금까지 예수님이 참포도나무 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분에게서 떨어지면, 참된 영적인 삶은 없습니다. 저기 바깥에는 많은 샘들이 있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그 샘물들이 거짓되고, 망가진 샘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샘물들은 생명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만이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영적인 생명은 그분에게서 흘러나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은, 아버지 하나님이 농부라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참으로 중생했다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들 중 한가지는, 쉴틈없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당신의 삶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제가 사실대로 말하자면, 어떤 때는 제가 죄수 같이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제 아버지 이시기 때문에 저를 구속하고 계시는 걸 느낍니다. 네, 제가 어떤 것들은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구속에서는 절대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저는 그분이 지속적으로 저를 인도하고, 보호하시고, 섭리하시고, 시험을 내리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 삶 가운데서 훈련하시고, 가르치시고, 지시하시고, 일하시되 이 모든 것을 지극한 인내와 사랑으로 행하십니다. 그 강인하신 손으로요. 저는 뜰에서 날뛰는 개처럼 되지 못합니다. 저는 그분께서 저를 쫓아오실 것을 알고있습니다. 당신은 이세상에서 날뛰고 다니시고 있으되 아무런 제제도 받지 않으시고 있지는 않습니까? 당신은 불신자들의 일들을 하십니까? 그들의 기쁨 가운데서 함께 기뻐하십니까? 그들과 동일하게 걷고 계십니까? 그들과 함께 재미를 보시다가, 주일 아침에만 종교라는 가면을 쓰고 계시는 않습니까? 당신이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농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아무런 제재없이 세상의 어두운 일들에 동참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사생자요 참 자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젊은 아가씨. 제 말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젊은 아가씨들도 다 지옥에 갑니다. 저희는 아버지가 농부라는 것을 절에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 삶에서 일하시는 어떤 면이 존재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속에는 '아들'이 하시는 일이 있죠. 그분의 가르침 속에서, 연구하면서 배우고, 외우고, 그의 가르침을 적용함으로 우리는 더 깨끗해지고, 열매를 많이 맺는 그릇이 되어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깨끗한 가지가 되어서 건강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속에는 '아버지'께서도 일을 하십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가지고, 그것들을 우리 삶 속에 적용시키는데 그분이 예정하신 대로 우리 경험 가운데서 섭리하시는 것으로, 예를 들면 시험이나 권징이 있겠죠. 그리고 우리에게는 삼위이신 하나님의 역사도 작용합니다. 이 모든 일들에서 그분이 일하시죠. 여러분, 이 가지 비유는 정말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왜냐구요? 이유는, 가지들은 반드시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야 하는데 그래야만 생명을 생성하는 포도나무의 진액이 가지로 통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 생명의 진액이 바로 성령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가 제 안에 거하십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마찬가지죠. 그러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시고, 그리스도는 그분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이 당신 안에 머물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입니다. 실제로, 이 땅 위의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성령이 행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삼위가 함께 하십니다. 아들이 당신을 가르치시고, 아버지께서 그 가르침을 적용시키시고, 성령께서 당신에게 능력을 공급하십니다. 자, 우리는 갈라디아서에서 배운 예를 알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투쟁이며, 언제나 항상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개혁신학주의의 어떤 부분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의 개혁신학이 오늘날의 현대 개혁신학과 같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고요 그들은 많은 경우 현대 개혁신학을 비판하면서 자랑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들은 자신들이 가장 영적이며, 경건의 중대한 문제들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곤 하죠 "저는 곤고한 사람이며 그저 죄인일 뿐입니다." 여러분,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말에는 뭔가 문제가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갖고 있다면, 당신에게는 하나님의 섭리가 함께 합니다. 당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친애하는 친구여러분, 당신에게 죄를 이기는 승리가 있어야 합니다. 네, 당신은 아마 죄와 사투를 버리실 겁니다. 네, 때때로 당신은 3발자국 전진하고 발자국 후퇴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실제로 일어나는 전투입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삶의 여정 가운데서 죄에 대한 승리를 찾아볼 수 없다면, 그것은 당신이 하나님을, 하나님이 당신을 모른다는 아주 중요한 단서입니다. "내가 그들을 그들의 모든 더러움과 우상들로부터 깨끗케 할 것이다." 제가 제 자신의 신앙생활을 표현해 본다면, 제가 지난 30년간의 제 신앙 생활을 되돌아본다면, 이 말씀이 다른 어떤 말씀들 보다 더 많이 제게 적용되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더러움과 우상들로부터 씻어 주시는 걸 봅니다. 그리고 그분은 제가 죽는 날까지 그 일을 계속 하실 겁니다. 왜냐하면, 저희가 완벽하게 될 때에 저희가 영화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오해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변화되실 수 있어요. 저는 거룩한 빛을 발하는 70,80, 대의 오랜 신앙인들을 만나봤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우리가 변화할 수 있다는 위대한 약속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제가 오늘 아침에 말씀드린 저의 간증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흉악한 거짓말쟁이를 구원하셨는지 말씀드렸지요. 그리고 중생함을 받은 후에, 저는 아직도 진실을 위해 몸부림 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쉬지 않고 저를 죽기까지 치십니다. 보십니까? "우리 안에 이 일을 시작하신 분은 이 일을 완성하실 것이다." 그분은 그렇게 하실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죄에 대한 승리를 맛볼 것이고요. 당신은 죄에 대해서 승리하고 계십니까? 다시 말하자면, 신앙생활은 구원 받은 후 일직선으로 성장만 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리고 일직선은 더더욱 아닙니다. 만약 선이 일직선이라면 그 말은 당신이 죽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당신에게 중생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게 어떤 방식입니까?" 당신이 물으신다면, 이렇습니다. 제가 여기 해발 0m 에 위치해 있다고 해봅시다. 그리고 저는 버지니아 주의 아름다운 산을 올라가기 시작할 겁니다. 제가 일정하게 올라가나요? 아니죠. 제가 일직선 상으로 올라가나요? 아니죠. 아니면 제가 수직상승 하나요? 아닙니다. 비행기 조차도 그렇게 이륙하지는 않죠. 그렇다면 저는 어떻게 올라갑니까? 저는 오르락 내리락하고 어떨 때는 평지를 걷고, 그리고 다시 올라갑니다. 어떨 때 저는 삶에서 위대한 진보를 이루고, 구원의 증거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어떨 때에는 한동안 아무런 변화도 없이 지나갑니다. 그리고 또 어떨 때는 이미 얻은 것들에서 퇴보할 수도 있겠죠. 가능합니다. 그러나 제가 참 그리스도인이면 당신은 제 생애에서 지속적인 진보를 볼 겁니다 어느 순간 당신은 잠깐의 퇴보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의 전체 생애 가운데서 당신은 하나님의 일들에 대한 진보를 발견할 겁니다. 당신이 중생한 이후로 사람들이 당신의 하나님의 일들에 관한 진보를 봅니까? 당신은 정직하게 당신이 은혜 가운데서 자라난다고 제게 말할 수 있나요? 당신을 의롭게 하신 분이 당신을 성화시키고 있나요? 이것은 정말로 중요한 질문입니다. 자,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시는 여러가지 이유들 중에 우리가 배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사랑하시고, 그 아들을 높이길 원하신다는 거죠. 하나님은 그의 아들로 부터 기쁨과 희락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과 희락은 순결한 신부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인 포도나무가 베베 꼬인, 열매 맺지 않는 죽은 가지들과 연합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아니라구요. 이러한 이유로, 여러분 중에 저와 목사님들처럼 거듭나신 분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겪게 됩니다. 하나님은 정말 많은 방식으로 당신을 손 보실 겁니다. 어떨 때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은혜 가운데 크게 자라나게 하기 위해서 그냥 그분의 능력으로 당신을 끄실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떨 때는 체찍질로 당신을 자라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분은 포도나무를 아름답게 가꾸실 겁니다. 다른 분들은 하나님께서 포도나무를 아름답게 하기 위해 제거하실 겁니다. 그러면 그분이 어떻게 그걸 하실까요? 신약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죽임으로 그걸 하실 겁니다. 말 그대로에요. 그분은 많이 참으셨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대표적인 예 입니다. 왜요? 그들이 포도나무를 흉하게 보이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 참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다른 어떤분들은 이렇게 제하여 지실 겁니다. 당신은 마침내 당신의 부모들로부터 자유롭게 될겁니다. 그들의 권위로 부터요. 그리고 당신은 바로 교회에서 떠날겁니다. 아마도 다른 교회에 갈 수도 있겠죠. 당신이 불신앙 가운데서 종교적인 것들에 참여할 수 있는 그런 교회에요. 그렇지만 그분은 당신을 순수한 그리고 진정한 교회로 부터 쫓아내실 겁니다. 그리고 당신을 제거하기 위해서 거짓된 어떤 것 가운데로 보내시겠죠. 이 말이 끔찍하다는 것 저도 압니다. 그렇지만 이건 사실이에요. 그분은 이런 일을 항상 하고 계십니다. 아시겠죠? 자, 하나님은 우리가 열매를 잘 맺게 하기 위해서 이러한 일들을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제 읽은 구절 가운데서 신자에 관련된 약속들이 있었는데... 여러분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그 중에 일부분을 다시 살펴보길 원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열매를 맺도록 하셨습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편 1:3)" 예수께서 말씀하셨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나를 믿으면 내가 하는일을 그들도 할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니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말하시는 것은 이렇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성령을 교회 위로 부을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교회는 통합적으로 이러한 위대한 일들을 할 것이고, 교회 안에 개개인들도 이러한 위대한 일들을 할 것이다. 그들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여러분, 저희가 '열매'라는 단어를 정의할 때 주의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죠. 만약 한 단어만을 조사하면, 여러분은 여러가지 단어의 조합들을 찾을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문맥을 살펴야만 합니다. 열매에 관련된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의 삶과 연관이 있습니다. 어떤 면에선 경건한 인격(성령의 열매)은 주님이 우리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열매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그의 사역을 이끄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당신의 삶을 볼때 어떤 세상적인 면을 발견하나요? 아니면 사람들이 당신의 주변에서 당신을 볼때에, 그리고 당신이 말하는 것을 들을 때에, 하늘의 맛을 보나요? 당신의 관점이 영원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영원의 감동을 느끼나요? 아니면 사람들이 당신과 만날 때 성경적으로 영향을 받나요? 사람들이 당신을 통해서 신앙의 도움을 받고, 신앙 가운데 자라나며, 당신을 만났을 때 죄인들이 찔림을 느끼나요? 당신은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입니까? 말씀해 주세요. 당신의 열매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지금 이 순간에 생각해 보세요. 방향을요. 당신의 마음 속에서 생각해 보세요: 내가 얼마나 열매를 맺는가? 당신은 많은 개신교도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알고있습니다: "음, 저는 매주 교회에 갑니다." 그래요? 당신은 얼마나 열매를 맺습니까? 만약 열매를 찾기 힘드시다면 당신은 그 사실에 쉬이 두려움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면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여기서 저는 정말 중요한 한가지를 살펴보고 싶군요. 우선 본문 4절로 6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자, 여기서 좀 살펴보고 싶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이것은 수동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이 사실은 어떤 다른 것들이나 다른 사람 또는 환경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사실을 서술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정말 중요하죠. 가끔 성도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약속으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닙니다. 이것은 약속이 아니고, 사실입니다. 그분이 말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이것은 어떤 조건부의 말이 아닙니다. 그분이 "나는 포도나무요." 라고 말하십니다. 그분은 포도나무이십니다. 정말로요. 이세상에 무슨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예수님은 포도나무 이십니다. 당신은 말하시겠죠.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그분이 당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이러합니다. "너는 가지라." 당신은 한 가지입니다. 이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왜냐구요? 그분의 말씀은, 당신이 진정한 신자라면, 가지가 되어야 한다 라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당신은 이미 가지입니다. 이 말은 현대의 개신교도들이 하는 말들 중에서 "당신이 기독교 인이더라도, 열매를 맺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라는 말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만약 당신이 그렇게 멋지게 살고 싶다면, 당신은 제자훈련과 다른 것들을 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열매맺는 가지가 될겁니다." 라고 할겁니다. 여러분 죄송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의미하는 것과 다릅니다. 그분이,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은, "나는 포도나무이다. 그리고 네가 나의 진정한 제자라면, 네가 진정으로, 성령을 통해 거듭났다면, 너는 새로운 창조물이다. 너는 진정으로 포도나무와 연합이 되었다. 너는 가지이다. 너는 열매를 맺을 것이다. 필히 그렇게 될 것이다." 맞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셨죠.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왜냐하면 신약성경에서 단 한번도 다음과 같은 질문은 찾아볼 수 없어요: "사람이 가지인 동시에 열매를 못 맺을 수도 있습니까? " 이러한 질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수 없거든요.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셨죠.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그리고 이 비유에서 가장 최저인 신자가 삼십 배의 결실을 맺었습니다. 당신은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정말로 열매를 맺고 있나요?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리고 당신이 가지이기 때문에 당신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열매를 하나도 맺지 못하신다면, 그것은 당신이 죽은, 꺾인 가지라는 말입니다. 그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닙니다. 저는 가끔 숲속을 돌아다닙니다. 제가 시간이 되면 오랜 시간을 숲에서 보냅니다. 그리고 사냥을 할때, 발견하는 것이 있습니다. 뭔가 좀 이상한, 맞지 않는 것이죠. 어떤 가지들이 한 나무에 달려있습니다. 여러개의 가지들이 한 나무로부터 뻗어 내려와 있습니다. 그냥 딱 봤을 때는 그 가지들이 전부 붙어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제가 나무로 올라가서 차보면, 그중 한 가지는 그냥 떨어져 버립니다. 그 가지는 정말로 나무에 붙어있던 것이 아니였습니다. 사실 그 나무는 참나무였는데, 그 가지는 느릎나무 가지였죠. 그 가지는 그냥 나무 위에 그럴듯 하게 떨어져 있던 거죠. 제가 한순간 봤을 때 진짜 처럼 보였던 가지가 실제로는 아니였던 것이죠. 제가 말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그 가지는 포도나무의 껍질을 갖고 있지 않다. 그 가지는 포도나무와 같은 잎사귀를 갖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 가지는 열매를 맺지 않는다. 그 가지는 말라버릴 것이다. 여러분들 중 일부는 항상 말라있습니다. 당신은 단 한번도 그리스도를 위해 생생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한번도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아시겠죠. 여러분이 신자라면, 여러분은 가지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가지라면, 당신은 열매를 맺을 겁니다. 여러분, 제자훈련이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심화시키는 것, 그것이 이번 집회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잘 다져서 더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열매 없는 신자가 될 것이다 라는 뜻은 아닙니다 자, 이 가지에 대한 비유는 정말 대단합니다. 그리고 드리고 싶은 말씀은, 가지는 혼자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겁니다. 안되죠, 여러분도 아시겠지만요. 제가 가지를 잘라버리면 뭐가 남나요? 그냥 죽은 물체죠. 그게 살아 있는 것 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며칠동안 만 입니다. 그게 어떻게 되죠? 시들어지고 말라버릴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지 혼자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결론을 얻습니다. 그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다면요. 그리고 제가 이와 다른 말을 한다면, 그것은 터무니 없는 소리겠죠. 제가 가지 하나를 들고 와서, 그게 열매 맺는 가지라고 말한다면, 당신이 볼때는 그것이 이미 말라서 시들어 있는데도 말이죠 그렇다면 당신은 "하, 이 사람 미쳤구만.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네. 불가능 한 소리를 하다 못해서 부조리 한 말을 하는구만"이라고 하시겟죠. 자, 그러면 이 점을 본론으로 가져가 봅시다. 한가지 생각해 보고 싶네요.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을 때 그 가지가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조리 합니다. 말도 안되죠. 그렇다면, 이 비유를 계속 따라가 보죠. 예수믿는 신자도 마찬가지로 혼자서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만약 그 신자가 진실되고, 영적이며, 그리스도와 계속된 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그래서 생명력 있고, 열매를 맺으며, 성령 즉 예수님의 생명이 그와 함께 한다면, 당신이 아셔야 할 것은 그 신자들은 이렇게 말할 거라는 겁니다: "저는요, 할 수 없습니다. 못해요." 아닙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못합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러면 좀 더 나아가 봅시다. 당신은 아무것도 못한다고 했죠. 만약 당신이 "나는 할 수 없습니다. 제 능력 밖입이다" 라고 말해도 겸손한 것은 아닙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떠나면 무능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어리석은 것임을 반드시 아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또한 대단한 일입니다. 만약 당신이 그리스도를 떠나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면,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제가 여러번 위인들의 전기를 쓰는 사람들을 속에서 발견한 건데, 위인 전기를 쓰는 사람들은 굉장히 경건한 사람들이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끝마친 후에는, 경건함을 창 밖으로 던져버리는 것 같더군요. 왜냐하면 그들이 찰스 스펄전에 대해 이야기 할때면 그들이 어떻게 말하나요? "이 사람은 기억을 사진 처럼 저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었죠." "이 사람은 이렇고, 저렇고..." 사람들이 굉장한 신학이론을 가지고 책을 쓰기 시작한 후에 그 책이 완성 되면 그 모든 것들을 내던져 버리나요? 당신은 찰스 스펄전을 그의 잠재력이나 은사들로만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이 그의 머릿속에 있던 것이 아닙니다. 그의 마음이 큰 것도 아니였죠. 단지 그의 안에 있던 그리스도 였습니다. 이해하시겠죠? 제가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성경의 한 인물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 당신은 그를 머릿속으로 생각해보시고, 그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네, 하나님은 당연히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적으로 상상할 수 있겠죠? 한번 그 사람의 모습은 마음 속으로 상상해 보십시오. 제가 그의 이름을 말하겠습니다. '삼손' 그가 당신에게는 어떻게 보이십니까? 아놀드 슈워제네거 유대인 판. 맞나요? 제가 팔레스타인 지역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구상에 누구도, 그가 아무리 거대한 이두박근을 가졌다고 해도, 한 도시의 성문을 뽑아서 자기 등에다 지고 저 언덕 위로 가지고 올라가서 던져 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당나귀의 턱뼈만 가지고 명의 팔레스타인인을 쓸어버릴 수 없습니다. 제 말의 요점이 뭔가요? 요점은: 우리는 언제나 보이는 것만 생각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언제나 사람의 재능만을 생각하죠. 언제나 그렇습니다. 그들이 왜 들릴라에게 가서 말하기를 "당신이 우리를 좀 도와야겠소. 우리는 그의 힘의 원천을 모르기 때문이오." 그래요? 자, 만약에 삼손이 그 초인적인 헐크처럼 근육질이었다면, 사람들 눈에는 그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쉽게 보였겠죠. 삼손은 아마도 보통 사람들과 같았을 겁니다. 아마도 마르고 다부진 체격이었겠죠. 그러면 어디서 그의 힘이 나오나요? 하나님의 성령만이 도시의 성문을 뽑아 올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만이 1000명의 사람들을 당나귀 턱뼈로 죽일 수 있습니다. 제가 무슨 말하는지 이해하시나요? 우리는 항상 육신적으로만 생각해요. "그는 재능이 많아. 청산유수야." "그는 이래, 그의 마음은 굉장히 민첩해." 진짜로요? 이 말이 성경이 말하는 것과 대조가 되지 않나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런 이유로 하나님이 거짓말쟁이를 진실을 말하는 사람으로 바꾸는 겁니다. 겁쟁이를 용감하게도 만드시죠.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그 능력이 사람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겁니다. 하나님 안에 죽은 자를 살리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없는 것을 있는 것과 같이 부르시죠. 이것은 정말로 심묘한 일입니다. 이것은 정말로, 제가 알 수 있는데, 그리고 확신하는데, 하나님의 뜻의 영역 안에서는 제게 불가능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저와 함께 계신다면요. 그러면 다시 개혁신학운동으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는 좀 더 긍정적인 것들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시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약속과 능력들에 대해서 더 많은 언급을 해야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기업들에 대해서도 언급해야 하죠. 자, 그리스도를 떠나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저희의 소명을 생각해 본다면 더욱 선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더 많이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말씀드릴 것은 정말로 중요한 일입니다. 신앙생활의 불가능성은 점점 더 명확해집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이 정말로 어떤 것인지 이해 한다면요. 예를 한가지 드려보겠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 몇분이나 팔복을 자신의 힘만을 가지고 실천하고 계시나요? 아니면 이것은 어떤가요. 남편분들? 고린도전서 13장, 에베소서 장의 내용을 아내에게 실천하십니까? 자, 제 생각에는 우리가 모두 동의하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신약성경에서 가장 단순한 계명들 조차도 실천이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생겼네요.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중생에 대한 이해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는 실패에 대한 이해 때문에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런 실패들을 보고 어떻게 하나요? 그들은 그저 움츠러들어서 말하죠. "그건 불가능해." 그런데 신약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을 명합니까? 우리의 불가능성을 인정하고 능력을 받기 위해 그리스도에게로 달려가라고 하죠. 우리의 약함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해되시나요? 그 약함 대신에, 사탄이 중간에 끼어들어서 거짓말을 할겁니다. 당신의 약함이나 당신의 죄악 때문에, 당신이 그리스도로 부터 도망쳐야 한다고 말이죠. 모든 죄악, 약함, 삶 가운데서의 실패. 당신이 이것들을 깨달았을 때, 방황하거나, 거짓말을 믿지 마십시오. 죄와 약함을 깨닫는 동시에 그리스도에게 바로 달려가십시오. 왜냐하면 당신이 이렇게 하는 것이 그분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사역에 대해 잠시 살펴보죠. 제가 어제 이 인용문을 찾고 있었는데, 다른 한 설교에서 찾아냈죠. 그게 이 것입니다. 기독교 사역에 대해서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리처드 벡스터가 쓴 "개혁주의 목회자."에 나온 내용입니다. 이것은 믿을 수가 없는 내용입니다: "제 아내가 오늘 하루가 어땠냐고 물었죠. 그리고 제가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지탱하고 있었소. 그게 내가 오늘 하던 일이오. 나는 이 세계를 지탱하고 있었소. 나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저주로 부터 구원하고 있었고, 모든 창조물을 완전하게 하는 일을 하고 있었으며, 그리스도가 죽으신 목적을 위해 애를 쓰고 있었소. 나는 나 자신과, 그리고 다른 이들을 멸망으로 부터 구원하고 있었고 하루 종일 사탄과 싸우며 극복하고 있었소. 그의 왕국을 멸절시키고 있었고,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룩하고 있었소.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들이 그 영광스러운 왕국에 들어가도록 돕고 있었소. 이것이 내가 오늘 해온 일이요, 부인." 이것이 리처드 벡스터 목사가 기독교 사역를 묘사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실 때 이중 어느 것 하나 한 남자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나요? 아니면 어느 것 하나 한 여자가 해낼 수 있는 일이 있나요? 기독교 사역이 뭐죠? 세상을 지탱하기를 힘쓰고, 천국을 확장하고, 사탄과 피터지게 싸워내는 것입니다. 이 중에 가능한 일이 있나요? 절대 없죠. 그렇지만 성령의 능력으로는요? 가능합니다. 저의 아들들이 제게 질문을 한 적이 있죠. '이안'이가 먼저 질문했고, 그리고 '에반'이와 놀아주고 있을 때도 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 아이들이 아직 어릴 때였죠. 이안이가 저를 보고 물었습니다. "아빠는 무슨일을 하세요? 아빠는 비행기를 많이 타시고, 여러 나라를 다니세요. 그리고 돌아오셔서는 피곤하시고 아프시곤 하는데, 무슨 일을 하세요 아빠?" 그때 저는, 그냥 설명을 해줄까 생각했죠. 그래서 말해주었습니다. "아들아, 아직 네가 어려서 말해줘도 모를거다." 그러면 애들이 어떻게 할지 다 아시죠? 갑자기 더 궁금해 하죠. "무슨 일 하시냐구요 아빠?" 제가 대답했죠. "말해줘도 안 믿을걸?" 그러자 저를 계속 따라다니면서 묻더라구요. "아빠 무슨일 하세요." 그래서 말했습니다. "아들아, 이 이야기를 듣고 네가 인정할 수 있겠니? 그리고 나를 믿겠다고 약속하겠니?" 그러자 "네" 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내가 무슨일을 하냐고? 나는 용들과 싸운단다." 그러자 아이가, "에이 아빠. 아빠가 무슨 용들이랑 싸워요?" 제가 말했죠. "아까 아빠말을 믿는다고 약속했잖니? 나는 용들과 싸운단다." "정말이요?" "그렇다니까." "크고 무서운 머리가 달렸나요?" "10개나 된단다 아들아." "아빠 그럼 칼도 있어요?" "그렇단다." 여러분은 제가 아이에게 수수께끼를 하듯이 눈높이를 맞춘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정말로 사람들을 억압하고, 죽이고, 노예로 삼는 용들과 싸웁니다. 용들과 싸운다구요. 아마도 너무 동화 같다고 생각하시겠죠. 그렇지만 저는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건 여러분들의 생각이니까요. 여러분들은 모든 것들을 물리적으로만 생각하시나요? 그래서 여러분의 삶이 무료하게 느껴지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재미난 것을 찾아 TV를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반지의 제왕을 시청하든지 아니면 실제로 살아내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죽어가고, 아이들이 굶주리고, 세상에는 억압 천지입니다. 악한 정부들, 노예들, 상상할 수 있는 것들 모두요. 수천명의 태아가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살해당하고 있습니다. 저는 용과 싸우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모든 것이 달라보일 겁니다. 우리가 기독교 사역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절대로 못합니다. 못해요. 놀랍게도, 4절에 있는 "할 수 없느니라."라는 말이 5절에도 반복됩니다. 예수님은 이 위대한 진리를 우리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여러번 반복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떠나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을 의지할 때 '할 수 있습니다.' 그분에게는 무슨 일도 어렵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어렵지 않으십니다. 제가 선교사들을 가르칠 때면, 제가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제게 한 남자와 성경책 한권을 주세요. 그리고 무릎 꿇고 기도한다면, 우리는 한 나라를 얻을 겁니다." 이런 이유로 팔복이 심령의 가난함으로 시작하는 겁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런 이유로 하나님의 섭리가 일하실 때 지속적으로 우리의 약함을 보이시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든 시험과 시련의 이유입니다. 듣고 계시나요? 모든 시험과 시련, 당신의 삶의 모든 풍파 등은 당신의 무능함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당신의 약함. 그리고 이것들은 당신이 다시 하나님을 쫓게 만들죠. 저와 같이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요한복음을 잠시 뒤로하시고, 고린도후서 4장 7절을 보시죠.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사용되는 단어들을 잘 살펴보시죠. 바울은 '능력의 심히 큰것' 이 그의 삶과 사역에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이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말하고 있죠. 바울이 말의 뜻은 이렇습니다 "그 능력이 내 안에서 힘있게 역사한다." 그래서 사람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아래에서, 그리고 자신의 자신의 은사 가운데서 운동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능력이 사람 가운데서 역사한 후에는 그의 육신은 힘이 빠져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한거죠, 이안 머레이를 저는 신임하는데, 그의 말을 잘못 인용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부흥이 지속되지 않는 이유는 계속해서 끊임없이 이어지지 않는 이유는 사람의 몸과 정신이 그것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진을 빼 놓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몇분만 계셔 보십시오. 그것이 어떤 느낌이지 아시겠나요? 그것은 EF5의 토네이도에서 3자 정도되는 곳에 앉아있는 것과 같을겁니다. 바울이 말하죠. -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많이 고난을 당하나 부서지지는 않습니다. 고뇌는 하나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핍박을 당하나 버림받지는 않습니다. 호되게 맞으나 멸망당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 몸에 지니고 다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나타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는 자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위해서 죽음에 넘겨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의 유한한 육체 가운데 나타나는 거죠. 바울의 말의 뜻을 이해하십니까?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일이며 계획된 것인데요, 그래서 바울이 그 자신으로써는 어떤 희망도 갖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성경학자가 한번만 더 바울의 지식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면, 저는 아마 그를 쏘아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죠. 신약 성경에 어느 부분에서 바울이 자신의 위대한 지식을 말합니까? 어디에도 없죠. 그런데 왜 바울의 이 모든 위대한 일들을 그의 지식과 결부시키는 겁니까? 바울은 그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 말했는데요 - 그는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서 무지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했죠. 그런데 그가 명확히 한것은, 그는 지식적인 노력으로부터 자유하기를 힘썼습니다 그는 그 자신이 말했던 것들보다 훨씬 더 잘 이야기 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말할 때에 그의 확신이 그의 지식적인 능력에서 나오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같이... 제가 읽죠. 고린도후서 12장 10절입니다. 그러므로 ~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제가 한가지만 묻겠습니다. 당신은 약함 안에서 만족하시나요? 이것은 또한 제가 싸우고 있는 부분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이 구절을 읽고도 어떤 싸움도 하지 않고,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 조차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화를 내고 싫어하는데 이유는 마음이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나 하나님이 원하는 기대치에 못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삶이 그들이 원하는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내곤 합니다. 그러나 약할 때에 만족하고, 결점에 만족하고, 문제들이나, 시험, 심지어 핍박이 올때까지 만족하고 남들이 욕할 때, 좌절시킬 때, 환란이 올때, 어려울 때 이 모든 것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만족합니다. 그러면 왜 바울은 그러한 상황에서 만족할까요? 그는 말합니다. "내가 약할때에 강하고" 그런데 바울 자신에게는 큰 힘이 될 수 있는 약할 때에 강하다는 그의 유익한 말은 우리가 기도모임에서 잘 들을 수 없는 기도제목이죠. 많은 사람들이 기도모임에서 나눌 때 이러한 모든 것들을 피하길 원합니다. 혹은 그들이 그러한 상황에 처해있다면, 그것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죠. 바울은 그 상황들 안에서 만족한다고 하는데 그는 이미 배웠기 때문이죠. 그는 자신에게서 전혀 소망을 찾을 수 없을 때, 그리스도에게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능력을 받아서 정말로 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쓰이길 원하면, (기드온의 부르심 이라고 하죠) 당신은 하나님이 기드온의 부르신 것 같이 당신을 적응시켜야 합니다. 당신은 아마, "그게 뭔가요?" 라고 물으실 겁니다. "기드온이여, 너는 우리를 미디안으로부터 구원할 것이다." 자, 그러면 하나님이 누굴 택하셨는지 봅시다. 두려움에 떨며 숨은 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기드온아 군대를 모으라."고 명하시죠. 기드온이 군대를 모집하자, 하나님은 그를 막으십니다.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죠. 무슨 문제죠? 군인의 수가 너무 많았습니다. 여러분들의 문제가 뭘까요?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실 텐데 왜죠? "저는 너무 작아요. 저는 은사가 없어요. 저는 특별하지 않아요, 저는 이게 없어요, 저는 지혜가 부족해요." 이게 부족해요, 저게 부족해요, 이도 저도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 모든 것이 장점들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말하십니다. "군인들의 수를 좀 줄여야 겠구나." "우선은 네가 얼마나 군인들을 모집하든 아무 상관이 없다." "너는 미디안 군대를 무찌를 수 없다. 그러나 나는 할 수 있지" "그리고 내가 군대를 무찌를 때, 너에게 그 공이 돌아가길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요 여러분, 무서운 일이 뭔지 아시나요? 하나님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행하시더라도, 사람들의 눈에 하나님의 역사가 분명히 나타났음에도, 기드온의 공이 전혀 없는데도 사람들은 그를 신으로 삼았습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입니다. 정말로요. 가끔 저는, 여러분들이 저와 저희 집에 같이 가셨으면 합니다. 이유는요? 여러분이 저와 가족들을 만나시길 원하니까요. 정말로요. 오시면 아마 많은 것을 배우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아마 그것은 여러분이 기대하는 것은 아닐겁니다. 저는 제 스스로가 진실하길 원합니다. 그리고 제 아내가 진실하다고 믿고 있고요. 저희가 위선자들이 아니길 바라고, 그리스도를 진실로 영화롭게 하길 원해요. 그리고 저희는 노력합니다. 저희 가정에는 규율이 있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이 모든 일들을 합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오시면 이러한 것을을 보시겠죠. 저희 가정은 불순종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오셔서 저희 모두 비슷한 문제들을 갖고 있는것을 보신다면 아마 많이 놀라실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힘드신 것은 저희들도 힘들어요. 당신의 인격이 부족하여 겪는 문제들을 저희들도 겪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신실하게 될 수 없다는 의미로 이 말을 하는건 아닙니다. 될 수 있어요. 그리고 저희는 신앙생활을 하고, 믿음의 가정을 꾸려나갑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이 저희 모두가 공통된 사람이라는 것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문제들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어리석은 문제들로 다투죠. 우리는 육신적입니다. 모두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약함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제 아내가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 사실을 갖고 저를 탓하지 않죠. 왜냐하면 제 아내는 신앙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제 아내는 가끔 제가 양말이 없어서 화를 내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려분이 그 회색 양말 때문에 그 엄청난 시험을 겪으시면서, 예수님의 모습을 닮을 수 없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런데 제 아내는 이렇게는 말하지 않습니다. "보세요. 당신은 양말 때문에 이렇게 화를 내면서, 어떻게 설교를 한다고 그러세요?" 제 아내는 그의 남편을 잘 알고있습니다. 제가 아내에게 저는 진실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란 것을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저 한 사람일 뿐입니다. 이해하시나요? 왜냐하면 제가 설교를 하면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와, 저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지?' 라고 생각하죠. 제가 어떤 사람이냐고요? 아마 아시면 놀라실 겁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제가 설교한 한 학교에서 부흥이 일어났다고 하더라구요. 아마도 부흥과 소동이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그 학교의 절반은 아주 좋아해했지만, 나머지는 저를 죽이고 싶어했지요. 그리고 학생들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희도 페루에 갈 수 있을 까요?" 저는 좋다고 했죠. "그리고 목사님처럼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들에게 좋다고, 페루에 오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비행기에 오르면서 저를 사도바울로 생각했겠죠. 그런데 두달후에 페루를 떠나면서 그들은 저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했을 겁니다. 여러분, 저는 거룩함에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어려분이 될되로 되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저는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제 요점은, 당신의 목사님들, 저는 그들이 신실하기를 원하고 그렇다고 믿습니다. 이틀 전에 여기 목사님 집에 머물렀었는데, 진실함과 사모함을 보았죠. 그리고 한 사람의 인간을 보았습니다. 아마도 저처럼 양말을 찾지 못하는 분을요. 제가 무슨 말씀 하시는지 아시겠죠? 아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께 영광되이 쓰이길 바라니까요. 그런데 많은 분들이 자신이 어떠한 신앙 수준에 올라 있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죠. 만약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저 자신은 그게 어느 정도 수준인지 모릅니다. 제 삼촌이 목사님이신데, 언제 저에게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저에게는 정말 위대한 교훈 중에 하나입니다. "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단다. 왜냐하면 그들은 항상 하나님이 어떤 수준으로 만들 때까지 기다리기 때문이지. 아니면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완벽한 상황이 만들어지길 바란단다." 그리고 삼촌이 말하셨죠. "지금 가거라." 이제는 마쳐야 할 시간인데 오늘 밤에 계속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것은 신실한 신자가 안다면 아주 도움이 될만한 진리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약함은 장애물이 아니고, 오히려 촉진제입니다. 신자들이 약한 것이 문제가 아니고 신자들이 자신이 약한 것을 믿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자신이 얼마나 약하다고 생각하는지 말씀드릴수 있습니다. 자, 여러분이 얼마나 약한지 한번 시험해 보시겠습니까? 이 전주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보내셨습니까?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기도하셨나요? 아주 조금의 시간만 여기에 쓰셨다면 여러분은 약하다고 여기는 분들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기도와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십니까? 만약 아니시라면, 저에게 거짓된 겸손을 보이지 마십시오. 저는 성경 말씀으로 당신에게 호령할 겁니다. 보셨죠? 여러분은 자신이 얼마나 약한지를 깨닫지 못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적인 약함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신지 아십니까? 여러분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눈을 뜨셨을 때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기도로 나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까지는 한 치라도 좌우로 움직이지 않을 거야.' '주여, 주님 은혜가 아니라면, 지금 제가 일어나서 침대 옆에 설 때까지 더 많은 죄를 지을 것입니다. 지금 이 짧은 순간 제가 일어날 때까지도 저는 넘어질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은혜가 없으면 저는 넘어질 것입니다. 저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하는 기도의 요점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바는 이렇습니다: "주여, 은혜를 허락하시옵소서. 주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저는 넘어질 것입니다. 저는 실패할 겁니다. 제게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아마도 물으시겠죠. "폴 목사님, 저희는 이미 은혜를 받았습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은혜를 더 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약함이 드러날 때, 신앙생활의 불가능성이 드러날 때 목회의 불가능성이 드러날 때 우리는 더 많은 은혜를 계속해서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그의 약함을 더 많이 자각할 때에 그는 그리스도께로 더욱 급히 다가가 그분께 매달릴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그 사람의 강함과 위대함입니다. 이제 보이시나요? 이것은 정말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저는 시험이나 훈계를 원하지 않습니다." 라고하면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섭리는 없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달려가서 힘을 구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마귀는 거짓말쟁이요 살인자입니다. 그는 거짓으로 살인을 합니다. 그러면 당신이 실패할 때를 가정해볼까요? 당신이 전날에 지은 죄를 다시 범했다고 칩시다. 그리고 그 전 날에도요. 그리고 그 죄는 당신의 삶에 지겹게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죄를 짓는다면 즉시 당신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내가 만약 그리스도께 가서 용서를 구한다면 그분 안에 거해 힘을 얻고자 한다면 위선이 아닐까? 나는 어제도 죄를 회개했는데 또 그짓을 하고 있잖아. 내가 제대로 회개하지 않은 게 확실해. 그리고 그 전전날에도 죄를 짓고 회개했잖아. 나는 확실히 위선적이다 정말" 그리고 당신은 듣게 되겠죠. "그래 너 위선자야. 위선자. 그에게로 가지마. 그분은 너를 원치 않아. 당장 가서 반성이나 하라구." 이것은 지옥에서 나오는 거짓말입니다. 참 회개는 그 죄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회개는 죄가 없는 완전함은 아닙니다. "나는 죄를 버렸어. 나는 그 죄를 혐오해." 그런데 저의 가장 큰 죄가 무엇인지 아세요 여러분? 제가 힘겹게 싸우는 것은, 불신앙과 걱정입니다. 불신. 걱정. 그리고 저는 가장 작은 문제들이 무섭고 걱정스럽게 변하는 걸 봐요. 그리고 저는 그것이 죄라는 걸 깨닫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큰 문제들로부터 구출해 주시죠. 그런데 저는 걱정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걸 회개하고, 미워하고, 그 죄를 버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출하십니다. 그리고 다른 상황이 닥쳐오죠. 그런데 그분이 저를 어떻게 구출하셨는지를 기억하는 대신 저는 다시 가장 작은 것부터 시작합니다. 걱정이요. 그렇다면 제가 실제로 회개 하지 않은 건가요? 아니요 전 회개 했습니다. 이것은 지속적인 과정입니다. 계속 진행이 됩니다. 그리고 조금씩 당신은 더 큰 승리들을 보게될 겁니다. 그런데 제가 배운 교훈은 이겁니다. 저는 그냥 앉아서 "아, 나는 이 죄를 벌써 수백번이나 저질렀어. 나는 그분께 더이상 갈 수 없어, 너무 미신적이야 이건." 그런데 이게 바로 마귀가 원하는 겁니다. 언제나 당신의 약함을 깨달았을 때, 당신은 곧바로 그리스도에게 가야합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자신이 가르치신 그대로 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물었었죠. "제가 몇 번이나 제 형제를 용서해 줘야 합니까?" "일곱번이요?"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일흔번씩 일곱번." 이건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언제나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분이 그분께서 가르치신 것을 행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저는 죄에대해 별다른 느낌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요. 그런 사람은 예수님을 천국행 티켓으로만 알죠 저는 죄와 투쟁하는 진실한 그리스도 인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당신의 투쟁 가운데서, 당신은 계속 그분께 갈 수 없다고 생각하죠. 이건 잘못 된 것 같아. 은혜가 이렇게 값없을 순 없어. 라는 생각이요. 그런데 여러분 당신의 신앙생활중에 가장 힘든 것이 뭔지 아십니까? 당신의 신앙 여정에서 가장 힘든 일은, 그 드높은 산을 오르기 위해서 가장 힘든 일이요. 준비 되셨나요? 이것은 당신이 성취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한다고 말씀하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이 오를 수 있는 정말 멋진 산이 아닐까요? 자, 그러면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은 듣고 이렇게 말하겠죠. "좋은데! 그러면 우리가 죄를 짓는다면 은혜가 더하겠구나?" 그런데 거듭난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말하겟죠. "만약에 이게 정말이라면, 주님의 사랑이 무조건적이라면, 그 은혜가 값없는 것이라면, 내가 모든 죄 가운데서 그분께 달려간다면, 내가 몇번이고 회개를 하든 상관 없이, 그분께로 가기만 한다면, 그분은 두 팔을 벌리고 나를 반기시면서, 용서하시고 나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게 하시겠지. 내가 얼마나 거룩해야 하고, 얼마나 헌신해야 할까!" 자, 그러면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이 주신 말씀 감사드립니다. 주님 저희가 당신과 당신의 약속을 믿게 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저희가 의심할 어떤 여지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당신과 같은 분이 어디에도 없고, 당신과 같은 모본을 보여준 이가 어디에도 없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견줄 만한 것은 없습니다. 가끔 저희는 그 약속이 너무 위대하기 때문에 믿지를 못합니다. 그것은 저희에게는 너무나 대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희가 이것을 믿는 것이 주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을 믿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